서 론
마그레브(Maghreb) 지역은 오랜 역사적 배경과 독특한 지리적 조건 속에서 오아시스 문명을 형성하여 발전해 왔다. 오아시스는 자원이 제한적이고 환경적으로 취약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발상지이자 대상 무역의 중심지이며, 다양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해 왔다. 오랜 전통과 지역적 지식 및 기술을 보존하고 있는 오아시스는 인간, 식물, 동물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며, 풍부한 생물다 양성을 지닌 보편적 문화 및 자연유산으로서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LabOasis 재단의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776개의 전통 오아시스 도시가 존재하며, 이 중 마그레브 지역에는 384개, 모로코에는 166개의 오아시스가 있다. 이는 마그레브 지역, 특히 모로코가 전통 오아시스 문화 보존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bOasis, 2025). 그중에서도 모로코의 피기그(Figuig) 오아시스는 전통적인 농업 시스템, 건축 유산,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Globally Important Agricultural Heritage Systems)으로 지정되었다.
피기그 오아시스는 극한의 사막 환경에서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독창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다양한 인종적ㆍ 문화적 요소가 융합된 피기그 오아시스 세계중요농업유산은 흙벽돌로 지어진 크수르(ksour), 정교한 관개 시스템을 갖춘 대추야자 농원, 전통적인 사회ㆍ문화적 관습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사하라 사막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이는 피기그 오아시스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적 연대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전통적인 관개 시스템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수자원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오아시스를 비생산적 공간으로 간주했던 기존 담론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다.
하지만 현대의 오아시스 농업은 관광 산업과 결합하면서 기능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일부 오아시스에서는 미적 가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농업 생산이 축소되거나 중단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인구 증가와 가뭄 등의 요인으로 인해 개별적인 양수(Pumping)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오아시스 내 수자원의 급감이라는 심각한 환경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상황과는 달리 2008년 모로코 토그다(Togdha) 오아시스에서는 전통적인 관개 시스템(Khettara)의 복원을 통해 지하수 수위가 회복된 사례가 보고되었는데, 이는 전통적 수자원 관리 방식이 현대의 환경적ㆍ경제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농업 유산의 보전과 경제 발전은 종종 상충하는 개념으로 간주된다. 일반적으로 농업 유산 보전은 기존의 환경을 유지 하는 정적인 과정으로, 반면 경제 발전은 지속적인 개입과 변화를 요구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인식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두 가지 목표를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는 조건과 방안을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둔다. 피기그 오아시스를 사례 연구 대상으로 삼아 사회경제적 발전과 유산 보존이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모로코 피기그 오아시스 세계중요농업유산의 다원적 기능과 사회적 농업으로서 확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차후 국제 개발협력과의 연계 방안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이에 먼저 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기준을 중심으로 유산의 일반현황, 지역적ㆍ전통적 지식시스템, 농업 생물다양성, 식량안보 및 생계 안정성, 전통적 수자원 관리 조직으로 유형화하여 피기그 오아시스 세계중요농업유산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피기그 오아시스 세계중요 농업유산의 다원적 기능을 경제ㆍ산업적, 사회ㆍ문화적, 생태ㆍ 환경적 관점으로 재정립하여 농업유산의 지속 가능한 농업ㆍ 농촌 발전 패러다임으로서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으로도 구분하였는데(OECD, 2008), FAO는 세계 중요농업유산 등재 기준을 통해 농업 시스템이 수행하는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세분화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선행 연구를 토대로 본 연구는 피기그 오아시스의 지역 경제 발전 및 산업 구조 개선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경제ㆍ산업적 부문과 농업이 지역 사회의 결속력 강화, 전통 지식 전승, 문화적 정체성 유지 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사회ㆍ문화적 부문, 그리고 생물다양성 유지, 토양 및 수자원 보호, 기후변화 적응 등을 포함한 생태ㆍ환경적 부문의 세가지 범주로 다원적 기능을 구조화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오아시스 시스템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기후변화, 자원 고갈, 지속 가능한 발전과 같은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사례로 평가되어야 한다. 피기그 오아시스의 세계중요농업유산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환경적ㆍ사회적ㆍ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지역들에 중요한 발전 모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로코 피기그(Figuig) 오아시스 세계중요농업유산
일반현황
모로코 남동부 알제리 국경과 인접한 세계중요농업유산 “피기그(Figuig)의 크수르(ksour) : 수자원과 토지의 사회적 관리를 기반으로 한 오아시스와 목축 문화”(이하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는 오리엔탈 지방(L’Oriental région)의 피기그 주(Province de Figuig)의 주도인 부아르파(Bouarfa)에서 100㎞ 떨어져 있다.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는 동부 하이아틀라스 산맥(Haut Atlas Oriental)과 사하라 아틀라스산맥(L’Atlas saharien)의 경계에 있으며, 사하라 사막 접경 지역(la zone continentale présaharienne)의 일부이다. 행정적으로 이 지역은 아부라칼(Abbou Lakhal) 농촌 코뮌(Commune, 최소 행정 단위)과 피기그 도시 코뮌으로 구성되며 두 도시 전부 피기그 주에 속한다.
과거 피기그 오아시스는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카라반 무역의 중간 기착지였으며, 또한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피기그는 베르 베르인(Berbères), 아랍인(Jaber, Murabitun), 안달루시아 무어인(Maures andalous), 아프리카 흑인(Haratines), 유대인 공동체 등 민족적ㆍ지리적 기원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베르베르인은 제나타(Zenata, 북부 베르베르인)와 제나가(Zenaga, 남부 베르베르인) 부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두 종류의 베르베르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FAO, 2021). 피기그는 35㎢ 면적에 인구는 2024년 기준 2,843가구 9,903명(남성 4,648명, 여성 5,255명)으로 2004년 12,577명, 2014년 10,872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목축업 중심의 3,102㎢ 면적에 아부라 칼(Abbou Lakhal)도 2024년 295가구 1,789명(남성 901명, 여성 888명)으로 2004년 1,497명, 2014년 2,017명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이 지역 인구 밀도는 모로코 지역 평균보다 낮은 편인데 출산율 감소와 이주 현상에서 기인한다. 특히 이주가 출산율 감소를 가속화하여 2024년 지역 인구 성비는 여성 53.1%, 남성 46.9%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HCP, 2025). 이러한 불균형은 경제 환경에도 반영되어 15세 이상 경제 활동 인구 중 취업인구 64.1% 중 79.9%가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피기그는 대추야자 나무숲의 전통적인 농업 지역임에도, 행정과 건설 분야가 주된 직업군으로 농업 부문 고용 비율은 10%에 불과하다(Janty 2014). 이는 농업이 주된 직업이기보다는 다른 주요 직업을 보완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1970년대부터 급증한 이주(성인 3명 중 1명, Bisson, 1990)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관련 기술 상실에도 원인이 있다.
피기그 기후는 지중해성 건조 기후로 연간 평균 기온은 20℃이며, 겨울철에는 일일 기온이 3℃∼16℃, 여름철에는 2 4℃∼42℃ 사이이다. 연간 강수량은 평균 122㎜에 불과하며, 강수는 주로 10월∼1월 사이에 집중된다(Janty 2014). 2006년 이후 강수량이 증가하고는 있지만 사막 기후와 모래 폭풍은 여전히 주요 기후적 제약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피기그의 가혹한 기후 조건 속에서, 오아시스 농업은 연중 지속적인 관개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외 지역에서는 목축업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는 다양한 식생을 보유하고 있어 지역의 독특한 농업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불어 사막화 및 기후변화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통적인 수자원 관리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어 지역 주민들의 생계유지와 환경 보존에 기여하고 있다.
지역적ㆍ전통적 지식시스템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는 아틀라스산맥의 독특한 지리적, 생태적 환경을 기반으로 오아시스 관개 시스템, 다층 경작 농업, 방목 등 지속 가능한 자원 관리를 통해 오아시스 생태계의 생존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전통적 지식시스템을 발전해 왔다. 특히 산맥에서 발원한 피기그 지하수는 깊이 1,500m 이상, 약 375㎢ 넓이의 리아스(Lias) 대수층에서 공급된다. 리아스 대수층은 거대한 지하 빗물 저장소로, 약 2,778 ㎢의 넓은 지역에 걸쳐 빗물을 저장하고 있다(FAO, 2021). 이 지하수는 자연적으로 솟아오르는 약 22개의 아르테지안 (artésiennes) 형태의 천연 지하수 샘(분출량 180 l/s)에서 나오는데, 피기그 오아시스는 이 샘에서 ‘포가라(foggara)’ 혹은 ‘케타라(khettara)’ 라는 복잡하고 정교한 전통적인 지하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여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포가라 시스템은 10∼11세기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의 지배 계층들이 노예들의 노동으로 구축한 지하수 로망으로, 수원을 보호하고 외부의 탐욕이나 갈취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물을 지하로 운반하도록 설계하였다(Janty, 2014). 현재 피기그에는 약 20개의 포가라가 있는데, 각 포가라는 세귀아(séguia)라는 개방형 수로를 통해 대추야자 농원 (jardin)에 물을 공급한다. 모로코 농업부 피기그 지방청(DPA)에 따르면 이 수로망의 전체 길이는 약 110㎞ 정도이고, 이 수로망 곳곳에는 200여 개의 저장용 저수지가 있다. 즉 물은 포가라에서 중력 흐름 시스템으로 저장용 저수지로 운반되고, 복잡한 분배기인 이쿠다스(iqoudass)를 거쳐 사용 장소로 운반된다. 세귀아가 비교적 큰 규모의 수로망으로 물을 대량으로 운반한다면, 수아기(souagui)는 작은 규모의 수로로 농원 내부에서 물을 세부적으로 분배한다. 물의 분배는 45분 동안의 물 순환을 의미하는 카루바(kharrouba)라 불리는 단위를 통해 측정한다. 카루바는 물시계(바닥에 구멍이 있는 반구형 구리 용기)로 측정하는데, 공정한 물 분배를 위해 각 크사르나 농원 소유주들은 물 관리 전문가인 에가디에 (aiguadier, 현지에서는 srayfi)를 고용한다. 에가디에는 사용자 간 발생할 수 있는 물 관련 분쟁의 중재, 관개 수로망의 유지 보수, 물 순환 일정, 물 측정 모니터링 등을 수행한다 (FAO, 2021). 소유자가 보유한 물의 분배량은 임대, 판매, 교환이 가능한 사유 재산으로 간주한다. 최근 잦은 이주로 인해 물에 대한 권리의 판매와 임대가 활발하지만, 물의 양은 제한적이어서 가격이 비싼 편이다.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에는 마그레브 지역의 요새화된 전통 마을인 크사르(ksar, 복수형 ksour)가 7개 있는데, 북서쪽에는 루다기르, 라비다트, 울라 슬리만, 엘 마이즈(Loudaghir, Laâbidate, Oulad Slimane, El Maïz)가 있고, 북동쪽에는 아맘 푸카니와 아맘 타타니(Hammam Foukani, Hammam Tahtani)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남쪽에는 가장 큰 규모의 제나가(Zenaga)가 자리잡고 있다. 루다기르, 라비다트, 울라 슬리만, 엘 마이즈, 아맘 푸카니는 고원(jorf)에 있으며 제나가와 아맘 타타니는 평원에 위치한다. 크사르는 오랫동안 자율성을 유지해 온 독특한 공동체이다. 각각의 크사르에는 진흙벽(pisé) 으로 둘러싸인 평균 0.5ha 크기의 작은 규모의 ‘농원’(jardin)에 가족들이 관리하는 대추야자 숲이 있다.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의 대추야자 나무숲 규모는 면적 약 650∼700 ha에, 총 147,000그루로 추정되며, 이 지역 과일나무의 75%를 차지하고 있다(FAO, 2021). 대추야자 나무숲은 전통적인 ‘다층 경작 농업’을 통해 대추야자 나무뿐만 아니라 과일나무, 채소 등 다양한 작목을 경작하고 있다. 다층 경작 농업은 높이가 15m∼30m에 이르는 대추야자 나무로 햇빛과 사막 열풍을 막아주는 미기후(microclimat)를 형성하고, 그 아래에 과일나무와 같은 관목층을, 마지막으로 채소, 곡물과 같은 초목층을 동시에 재배하는 전통적인 오아시스 농업 방식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농업 시스템은 관개 수로망을 통해 농원에 도달하는 제한된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농업 생물다양성
피기그 오아시스 GIAHS 지역은 생태적으로 구분되면서도 경제적ㆍ사회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농업 시스템, 즉 아부 라칼의 방목지와 피기그 오아시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의 농업 생물다양성은 매우 풍부한데, 이는 자급자족적인 경작 시스템, 다작물 재배와 전통 농업 기술 생산 방식, 다양한 생태계 덕분이다. 지역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주로 곡물, 콩류, 원예 작물, 그리고 대추야자 나무, 올리브나무, 아몬드나무 등과 같은 다양한 과일나무가 있다. 대추야자 나무는 14개의 토종품종이 있으며, 그중 아시엔(Assiane, 48%), 부르페구스(Boufeggous, 17%), 아지자(Aziza, 5%)와 같은 품종이 대표적이다. 지역 재배 작물은 총 45종, 75개 품종으로 대추야자는 100% 재래 품종이며, 원예 작물, 콩류, 과일나무 는 80% 이상, 곡물의 경우는 40% 미만이 재래 품종이다 (FAO, 2021).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에서의 가축 사육은 주로 드만 (D’man) 품종의 양과 생산성은 낮지만, 적응력이 강한 현지 품종의 소를 사육한다. 오아시스 GIAHS 내 축산농가는 437 농가로 양 23,405마리, 염소 6,400마리, 소 7,360마리, 말과 기타 가축 11,032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고유품종으로 ‘지리적 표시 보호 품종’(PGI)인 비니 길(Bni Guil) 품종의 양은 뛰어난 성장성과 품질로 지역 주요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피기그 지역 야생 동물군은 43종의 포유류, 171종의 조류, 25종의 파충류 및 양서류로 오아시스 수자원과 자연 서식처로 인해 매우 풍부한 편이다. 특히 포유류 중 큐비어 가젤, 황금자칼, 붉은 여우, 벌꿀오소리, 바르바르 땅다람쥐 등 10 여 종은 멸종위기 종으로 세계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다. 야생 식물군은 건조한 지역임에도 46개 과에 속하는 258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 중 30종이 고유품종이며 13개 종은 희귀 품종으로 분류된다(FAO, 2021).
식량안보 및 생계 안정성
피기그는 사막 지역에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고 있는 데, 오아시스 농업 문화와 유목민의 목축 생활 방식을 상호 보완하는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이곳은 농업, 무역, 공예, 문화 및 종교적 기능이 결합된 곳이다. 따라서 피기그 오아시스 GIAHS 지역 주민의 경제 활동은 기본적으로 광범 위한 목축업과 오아시스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에스파르 토(alfa, 벼과의 식물)로 덮여 있는 넓은 목초지는 방목에 적합한 공간을 제공하고, 오아시스 농업은 지역 식량 자급자족 과 가축 사료로 사용된다. 이 지역의 농업 이용 면적(Utilised Agricultural Area, UAA)는 건천(乾川, wadi) 가장자리나 오아시스의 관개 지역의 소규모 관개 필지와 아부라칼 코뮌의 천수 농경 지역으로 구성된다.
대추야자는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이나 코란과 성경에도 언급된 중요한 열매로 주로 이슬람교도들이 소비하는 음식이다. 특히 대추야자는 라마단 기간에 금식 시간이 끝난 후에 자주 먹는 음식으로, 탄수화물, 섬유질, 미네랄이 풍부한 완전식품으로 평가된다. 대추야자는 피기그 지역 주민들에게도 중요한 식량 공급원으로 매 식사때마다 대추야자를 섭취하며, 1인당 연간 70kg을 소비한다(Janty, 2014). 피기그 지역에서 생산된 대추야자는 자가 소비하거나, 고품질 품종은 판매 되거나 이주한 가족들에게 선물로 보내진다. 또한 대추야자는 항아리에 반죽 형태로 저장하여 소비하거나 시럽, 말린 과일 형태로 판매되어 주민들에게 추가적인 소득원을 제공한다. 대추야자 나무는 식량 자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데, 잎, 줄기, 카르나프(Karnaf, 야자잎 밑 부분), 대추야자 씨 등 부산물은 건축 자재나 땔감, 전통 공예품, 동물 사료로 활용되어 지역 내 자급자족적 경제 구조 형성에 기여한다 (Tengberg, 2009).
피기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주요 곡물은 부드러운 밀(blé tendre), 딱딱한 밀(blé dur), 그리고 보리(orge)로 주로 빵과 쿠스쿠스를 만든다. 옥수수는 우유와 함께 세몰리나(semolina) 형태로 소비되는데 피기그 가정의 일상적인 저녁 식사이다. 누에콩(fève), 완두콩(pois), 강낭콩(haricot)과 같은 콩류는 지역 주민들의 식단에서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며, 양파, 감자도 지역 주민들의 식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기그 오아시스 가축 사육은 피기그 지역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대부분의 가구는 양, 소, 염소를 가구 축사나 대추야자 나무숲에서 사육한다. 한 가구당 다산성으로 유명한 드만(D’man) 품종의 양을 2∼3마리 키우거나, 생산성은 떨어지지만, 우유와 육류를 제공하는 지역 고유품종의 소를 사육하고 있다. 이러한 축산 형태는 많은 사료가 필요하지만, 가축 배설물을 통한 토양 비옥도를 유지하고 대기 중 질소를 안정시켜 관련 작물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 반면 아부라 칼을 중심으로 한 가축 사육은 유목민과의 계약을 통해 가축을 사육하고 있다. 전통적인 방목 시스템과 계절적 이동 방목(transhumance)은 가축이 자연 방목지를 이용하도록 하여 사료비를 절감하고 생태 환경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인해 방목지 감소 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 정부와 협력하여 지속 가능한 방목지 관리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전통적 수자원 관리 조직
주지하다시피 피기그 오아시스 GIAHS 지역은 수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으로, 연간 강수량이 122mm에 불과 하다. 부족한 수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관리를 위해 모로코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구성된 ‘지마(Jmâa, 관례법 위원회)’ 라는 전통적 협의체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마는 관개 시설, 모스크, 방목권과 같은 공동자산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비공식적 사회⋅정치적 시스템이다. 크사르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각 가문의 대표로 구성되는데, 경험, 연륜, 재산 등의 기준으로 선발하며 ‘의장’에 해당하는 직책은 없다(Zaïd, 1992). 지마는 규정을 정해 공정한 물 배급, 기후나 계절에 따른 수자원 변동 사항 조정, 사용자 간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조정, 관개 시설 보수⋅관리 등을 결정한다. 현재는 국가에 의해 조직된 농업용수 사용자 협회(AUEA)가 도입되면서 지마의 직접적인 역할이 감소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크사르 공동체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피기그 오아시스의 제나가 지역에는 유일하게 물 분배가 최대한 정확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고용된 에가디에의 협의 기구인 수로관리위원회(Conseil des aiguiadiers)가 있다. 관개 시설이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구축된 제나가 지역 위원회는 매년 두 번씩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각 크사르 에가디에 모임을 갖는다. 이들은 수원지에서 시작된 용수 배수 일정 결정, 관개 시설 유지 보수를 위한 물 사용 요금 설정, 포가라 준설 공사를 위한 추가 작업일 지정을 논의한다.
이러한 피기그 오아시스 내 전통적 사회 조직을 통한 토론 문화와 연대 의식은 오아시스 세계중요농업유산이라는 물리적,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모델로서, 그리고 지속 가능한 농업과 환경 관리에 대한 함의를 제시한다.
피기그 오아시스 세계중요농업유산 특징 및 발전 방안
경제ㆍ산업적 부문
국립 오아시스 및 아르간 지역 개발청(ANDZOA, Agence Nationale pour le Développement des Zones Oasiennes et de l’Arganier)에 따르면 모로코 대추야자 생산량은 세계 12위,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4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25년 수확량은 103,000톤으로 추정된다. 대추야자 재배 면적은 약 64,000ha에 720만 그루가 재배되고 있다. 주요 생산지는 피기그(Figuig), 에라시디아(Errachidia), 팅기르(Tinghir), 우아르자자트(Ouarzazate), 자고라(Zagora), 타타(Tata), 겔밈(Guelmim), 아사자그(Assa-Zag) 등 중동부 8개 지방의 90개 오아시스이다. 특히 2024년 총생산량 115,000톤 중 드라아-타필랄레트(Drâa-Tafilalet) 지방이 대추야자 생산의 79%(91,500톤)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스마사(Souss-Massa) 지역이 11% (12,500톤), 오리엔탈(Figuig 포함)이 7%(7,500톤), 겔밈-우에드 나운(Guelmim-Oued Noun) 지역이 3%(3,500톤)를 생산하고 있다(Medias24, 2024). 모로코 대추야자는 다양한 품종으로도 유명한데 453종 이상의 대추야자를 생산한다. 메주울(Mejhoul), 뷔페구스(Bouffegous), 네지다(Nejda) 품종은 생산량의 35% 이상을 차지한다(Le360, 2025). 대추야자 가격은 품질과 품종에 따라 15DH∼110DH/ ㎏ 범위에서 형성된다. 대추야자 가공산업은 2023년 27,000톤 (국내 생산의 20%) 이상의 대추야자가 가공되었고, 433개 협동조합이 가공 인프라와 연계되었으며, 총 7,637명(여성 1,474명)의 농민이 가공산업에 참여하고 있다.
오리엔탈 지역 농업국(DRA, Direction Régionale de l’Agriculture de la région de l’Orienta)은 피기그 주의 오아시스 대추야자 생산량을 2023년 7,300톤, 2024년 8,000톤으로 추정하였다. 피기그 주의 오아시스 면적은 7,000ha로 피기그를 비롯하여 아부라칼, 앤 슈아테르(Aïn Chouater), 앤 샤이르(Aïn Chaïr), 부아난(Bouanane) 오아시스를 포함하고 있다. 오아시스에 심은 대추야자 나무의 면적은 약 2,600ha이며 이 중 1,200ha는 전통 오아시스이고 1,400ha는 ‘확장 농장’이라 불리는 새로운 농지이다. 2024년 기준 대추야자 나무를 통해 창출된 매출은 3억 9,800만DH이고, 연간 96,000일의 근무일을 창출하고 있다(Hespress, 2024).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만을 국한하면 총 650ha에 147,000 그루의 대추야자 나무가 있으며, 약 1,260명의 농부가 대추야자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 대추야자 나무 품종은 아시엔 품종이 3,100톤 정도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소량 생산되는 아지자 부지드(Aziza Bouzid, 140톤)와 같은 품종은 고가로 거래된다. 전통 오아시스의 경우 대추야자가 주 소득원인 농원 소유자들만이 상업적으로 대추야자를 판매하고, 다른 수입원이 있는 경우 초과 생산분만을 판매한다. 최근 전통 오아시스 주변에 새롭게 조성된 확장 농장은 단일 품종 생산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으며,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아지자 부지드, 부르페구스(Boufeggous) 품종을 지리적 표시 보호 품종(PGI)으로 지정하여 상업화 촉진에 기여하고 있다.
2023년부터 모로코 정부는 ‘Génération Green 2020-2030’ 전략의 일환으로 대추야자 산업 발전을 위한 피기그 주관개 농업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르키자(Rkiza) 댐과 스피세프(Sfissef) 댐의 급수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2,000ha 면적에 점적 관개 농업을 확대하였고, 약 1,500m 길이의 전통 포가라 복원과 약 1,200m의 수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추야자의 마케팅ㆍ유통 활성화를 위해 연간 2,800톤의 대추야자를 가공할 수 있는 4개의 가공ㆍ포장 시설도 운영하고 있다(Journal eco, 2024).
피기그 오아시스 GIAHS 내에서의 가축 사육은 농가의 경제적 안정에 기여하고 생태계 유지와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가축을 사육하고 있는데 농가 내 축사나 대추야자 나무농원에서 직접 키우거나, 유목민과 다양한 계약을 통해 사육하는 방식이다. 이 지역의 목축 형태는 생계형(54%), 농가형(40%), 기업형(6%) 목축으로 나뉘는데 가족의 소규모 생계형 목축은 교통수단이 부족하고 제한된 구매자로 인해 수익이 낮은 편이다. 반면 기업형 목축은 이동 수단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유리한 시장을 선점하여 생계형 목축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렇듯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대추야자 산업은 계속해서 확대되고는 있지만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는 몇 가지 경제ㆍ산업적 문제점 또한 안고 있다. 첫 번째는 대추야자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2021년 기준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에서 생산된 대추야자는 약 5,000톤으로, 이 중 19%만이 판매되고 나머지 45%는 자가소비, 30%는 가축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생산성 있는 대추야자 나무도 65.5%에 불과한데, 이는 대추야자 나무에 가장 큰 타격을 주는 베이우드(bayoud, Fusarium vasculaire)라는 대추야자 질병 때문이다. 이 질병은 토양에 서식하는 곰팡이인 Fusarium oxysporum f.sp. albedinis에 의한 진균성 질환 (cryptogamique)으로, 감염된 나무는 치명적이고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는다(FAO, 2021). 이 질병은 대추야자의 생산성 저하의 주요 요인으로,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전체 대추야자 생산량의 약 8%를 감소시켰다. 게다가 2024년 대추야자 가격은 15DH∼110DH/㎏으로 지역, 품종에 따라 가격 변동성도 큰 편이며, 가공산업에 필요한 냉장 및 저장시설 부족, 유통망 부족으로 가격 경쟁력이 낮다는 문제점도 있다. 둘째는 가축 사육에 따른 문제점이다. 생계형 목축은 기업형 목축에 비해 수익이 절반 수준이다. 이는 생계형 목축업자들의 낮은 협상력과 유통 채널 부족에서 나타난 문제로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또한 가축 증가와 방목지 개간으로 인해 에스파르토(alfa)와 쑥(armoise)과 같은 사료용 식물이 자라는 방목지의 생산 기반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셋째는 관광 및 수공예 산업의 부진이다. 피기그 오아시스는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높아 관광 산업 잠재력은 크지만, 인프라 부족으로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아시스의 연간 관광객수는 약 1,647명 수준으로 숙박, 교통, 도로 등의 기반 시설 부족은 방문객 유치에 한계가 있다(Prim, 2025). 전통 수공예 산업 분야도 피기그는 직조, 보석, 도자기 등 공예품 생산이 활발했지만, 공산품과의 경쟁으로 인한 시장성 약화와 더불어 생산성이 낮고 유통망이 미비하여 경제적 지속 가능성이 떨어지고 있다. 또한 수공예 산업을 이어갈 젊은 인력 부족으로 세대교체의 어려움도 문제로 남아 있다.
사회ㆍ문화적 부문
피기그 오아시스는 모로코 동부 지역에서 고유한 문화적ㆍ 생태적 가치를 지닌 지역으로, 인문 사회적 요소와 자연환경 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독특한 사회ㆍ문화적 체계를 형성해 왔다. 이곳은 오랜 역사 속에서 동서 및 남북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으며, 8세기 아랍ㆍ이슬람 정복 이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의 교역로 중간 기착지로 발전해 왔다. 또한 이 지역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선사시대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독특한 역사적 유적과 기념물뿐만 아니라 크수르, 카스바, 모스크 등 다양한 역사적 유산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화재는 지역 주민들에게 오아시스가 단순한 역사적 유산을 넘어 정체성과 자부심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오아시스 문화, 유목민 문화, 다민족 문화 등 다양한 문화적 전통이 융합된 독특한 사회ㆍ문화적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오아시스 문화는 점토질 건축 양식의 크수르, 대추야자 나무숲과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개발한 다양한 해결책으로 구성된 독특한 문화이다. 피기그는 1963년 ‘사막전쟁(La Guerre des Sables)’ 중 알제리와 지정학적 충돌로 새로운 국경이 만들어졌고, 피기그 오아시스 농민들의 토지와 90,000 그루에 달하는 대추야자 나무를 잃었다(Jamali, 2013). 새로운 국경은 피기그 오아시스를 지리적, 경제적, 정책적으로 고립하게 했지만, 역설적으로 과도한 관광으로부터 오아시스를 보호하고, 역사적 구조물과 전통 관개 시스템을 보존하는 긍정적 효과도 가져왔다.
특히 피기그 대추야자 나무숲은 단순히 식량 및 가축 사료 공급의 기능을 넘어, 강렬한 태양과 사막 바람으로부터 오아시스를 보호하는 자연적 방패 역할도 한다. 대추야자 나무숲이 형성하는 캐노피(canopy)는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미세기후(Microclimat)를 제공하여 다층 경작 농업을 통한 다양한 작물의 생육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UNESCO, 2013). 또한 대추야자 나무숲은 주민들의 사회적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공간의 역할도 하며, 나아가 주민들의 가족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 상징의 기능도 한다. 대부분의 대추야자 나무농원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가문이 소유해 온 조상의 농원으로 “작업 공간만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과 같은 독립적인 존재”로 여겨진다(Battesti 2005). 이러한 인식은 대추야자 나무의 사회적 기능과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농원에 대한 깊은 애착은 오아시스 농업 유산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동력으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피기그 오아시스의 역사는 수 자원의 사용과 소유의 역사로, 인구 집단 간에 행해진 갈등과 최종적으로 도달한 균형이 모두 물에 대한 통제와 직결된다. 건조한 환경이 강요한 어려운 생태적 조건 속에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오아시스 공간에서는 자연 현상의 불규칙성에 적응하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다. 물 분배는 기술적 제약과 생산성의 요구뿐만 아니라, 인구 계층의 복합적인 사회 논리에 따라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피기그 오아시스 사회 구조는 이 과정을 사회적ㆍ정서적 가치로 반영하여 일상 속에서 공동체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즉 피기그의 공동체성은 오아시스 수자원 관리를 위해 지마(Jmâa)가 수행하는 집단 과업인 포가라 건설과 수로 인프라의 공동 작업이나 수확기 공동 작업인 ‘트위자 (Twiza, Touiza)’를 통해 세대 간 지식과 전통 기술의 전수 및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나타난다.
이렇듯 피기그 주민들의 농업유산에 대한 보전 의지, 공동 체적 응집력, 정체성 확보 의지는 세계중요농업유산의 역동적 보전(dynamic conservation)과 지속 가능한 관리(sustainable management)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사회ㆍ문화적 측면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점이 있다. 먼저 인구 이주 및 도시화이다. 피기그는 1960년대 새로운 국경으로 인한 고립 이후 많은 주민이 경제적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이주를 선택하였다. 이주 형태는 전체 가족이 오아시스를 떠나는 영구 이주나 가족 일부가 남아 농원을 관리하는 임시 이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피기그 대추야자 나무 관리와 관개 시스템을 유지하는 농업 노동 인구는 급감 하였고, 전통적 공동 작업 방식(Twiza) 및 전통문화 전승 구조가 붕괴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이주민의 송금은 오아시스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는데, 이 자금은 무분별한 시추나 현대화된 ‘확장 농장’ 건설에 사용되면서 물 부족 문제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주민들의 재정적 성공과 송금은 피기그 청년 세대를 오아시스 정원에 대한 무관심을 야기시키고, 나아가 청년 세대의 농업 참여 저하에 따른 농업 생산성 감소와 전통 기술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두 번째는 여성의 농업 참여 권리에 대한 제약이다. 주지하 다시피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의 농업 노동 고용 인구는 10%를 넘지 않으며, 이중 농업 생산의 약 60%는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오아시스의 혹독한 기후 조건에서 오아시스 여성들은 가정 경제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면서 식품 가공 및 보관 기술을 후세대에 전수해 왔다. 또한 모든 작물의 종자를 선별, 준비, 보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가축 관리에서도 여성은 젖소 사육과 우유 및 버터 생산을 담당하며, 가축의 나이와 생산을 판단해 교체 여부를 결정한다. 더불어 여성들은 양모를 가공해 카펫, 버누스(bernous), 젤라바(djellaba) 등의 제품 제작 전문성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전통 전문 지식은 가정 경제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여성은 생산 수단 및 토지 소유 측면에서는 극히 제한된 권한만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피기그 내 여성 소유의 토지는 전체 토지의 2%에 불과하며, 경제적 자원의 소유율은 1% 미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FAO, 2021). 2004년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을 명시한 개정 법안인 ‘엘 무다와나(El Moudawana)’가 제정된 이후에도 피기그를 포함한 오아시스 여성들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피기그 오아시스 여성들은 가정 경제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여성의 경제적 자원의 소유율은 1% 미만이다. 또한 의사 결정 참여와 오아시스 농업 생산수단, 농업용수, 정보, 기술 등 농업관련 서비스 접근에 불평등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제도적 장벽은 여성의 전통 기술 및 노하우 활용 기회를 제한하고, 결국 오아시스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생태ㆍ환경적 부문
피기그 오아시스 GIAHS는 전통적 농업 시스템과 독특한 생태적 환경을 유지해 온 지역으로, 지속 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식량 생산 모델을 유지해 왔다. 이는 ‘기아 종식’을 목표로 하는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SDGs 2를 실현 해 온 것이며, 수자원 사용 효율화를 위한 전통적인 관개 시스템과 중력 관개 방식, 그리고 목초지 관리 시스템인 ‘트랜 스 휴먼스(Transhumance)’를 통한 지하수 재충전으로 수자원 관리 목표인 ‘깨끗한 물과 위생’(SDGs 6)에도 기여하고 있다. 피기그 오아시스는 인간 활동과 자연 간의 긴밀한 공생 관계를 통해 형성된 전형적인 문화경관도 제공한다. 대추야자 나무숲 경관으로 대표되는 피기그 오아시스는 진흙벽으로 구획된 농원과 미로처럼 얽혀 있는 길, 야자나무의 캐노피가 형성한 미세 기후를 통해 오아시스 내의 온도를 선선하게 유지하고 있다. 특히 대추야자 나무는 식물학적 특성 덕분에 오아시스 내 다른 농작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얕은 층에 뻗은 대추야자 나무뿌리 시스템은 주변 작물의 성장을 돕고, 나무의 줄기와 잎은 모래와 바람을 차단하며 수분 증발을 지연시키는데 기여한다. 이는 사막화,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와 같은 생태ㆍ환경적 문제에 직면한 지역적 맥락에서 인간과 환경의 긍정적 상호작용을 긍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최근 피기그 대추야자 나무숲은 대추야자 생산량 감소와 더불어 토양 황폐화, 도시화 등으로 인해 조금씩 풍요로운 전통적 경관을 잃어가고 있다. 1983년에서 2009년 사이 대추야자 나무숲은 276.3ha에서 223.5ha로 20% 정도 감소하였다(FAO, 2021). 대추야자 나무숲은 현재 약 4.3% 정도가 베이우드 곰팡이병에 걸려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피기그 대추야자 나무는 다양한 품종으로 유명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약 12종의 대추야자 품종이 사라지면서 다양성도 줄어들었다. 이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인 ‘그린 모로코 계획(Le Plan Maroc Vert, 2018∼2020년)’과 그린 제너레이션(Génération Green, 2020∼2030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집약적 재배를 위해 야자나무 숲을 확장하고, 상업적 가치가 높은 대추야자 단일 품종 재배를 장려한 원인도 있다. 이와 더불어 계획 없이 진행되고 있는 도시 확장과 주택 건설은 대추야자 나무숲의 생존을 위협하고, 이와 함께 피기그 오아시스 정체성과 건축 유산 전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농업구조를 붕괴하여 지역 농업의 생산성을 감소시키고, 환경적 측면에서 대추야자 나무숲의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피기그 오아시스의 수자원 공급은 전적으로 지하수 확보와 관리에 의존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39개의 샘에서 초당 300L의 물이 오아시스에 공급되었으나, 현재는 22개의 샘에서 180L만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지난 50년 동안 물 공급량이 40% 감소한 것으로 지하 수자원 감소, 과도한 양수(Pumping), 관개 시스템 노후화로 인한 물 낭비가 주요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수자원의 급감은 대추야자 나무농장과 지역 주민의 식수 공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연구에 따르면 1인당 100∼120L, 연간 약 80∼100만㎥의 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추가적인 수자원 확보가 필요하다 (FAO, 2021). 게다가 오아시스 확장 농장의 과도한 양수로 담수층과 염분층 간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수질의 염류화가 빈번해지고 있다. 이는 염소와 나트륨이 풍부하였던 피기그 오아시스 수질이 염분 농도가 높아지면서 지역 토양도 함께 염분화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얕은 깊이의 몇몇 지하수로(foggara)는 목욕탕이나 세탁소로 개조되어, 오아시스의 관개 수로를 세제가 포함된 인산염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러한 수질 오염은 오아시스 지역의 생태계와 농업 생산성에 심각한 위협을 발생시키고 있다.
오아시스는 사막화의 생태적 장벽 역할과 생물 다양성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피기그 오아시스 지역은 심각한 사막화와 모래 침식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후 조건과 자연 자원의 과도한 사용에서 기인한다. 이 지역은 가정용 나무 연료의 무분별한 채취와 과도한 방목으로 인해 최근 식생이 심하게 감소하여, 천연 초지 면적의 45%가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형태의 침식이 발생하고 있으며, 바람에 의해 모래가 이동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모로코 기상청에 따르면 풍속 15m/s 이상의 사막 폭풍 빈도가 1990년 대비 30%나 증가하였다. 모래 침식은 사막화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로, 특히 이 지역의 중요한 생태 자원인 대추야자 농장을 위협하고 있다. 사막화는 식생 파괴와 모래 이동을 가속화하여 생태계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 론
세계중요농업유산은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농업ㆍ농촌의 역사ㆍ문화ㆍ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지역민들의 공동체적 정서까지 담고 있는 지역발전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세계중요 농업유산은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농업, 생태계, 지식ㆍ기술, 사회ㆍ문화, 경관 등의 요소들과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형 성된 복합적 시스템으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와 농업의 인문ㆍ사회적 가치를 보여주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이다. 따라서 세계중요농업유산은 단순히 역사, 문화, 환경 보존의 의미를 넘어 교육적, 사회적, 산업적 가치를 창출하고 국가 이미지 제고와 지역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중요 농업유산은 사라질 위기에 있는 전통과 환경, 문화 시스템을 보존함으로써 농업과 농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다.
모로코 피기그 오아시스의 세계중요농업유산 지정은 이 지역이 지닌 다층적 가치와 지속 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보전 하려는 국제적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본 연구는 피기그 오아시스의 전통적 지식 시스템, 농업 생물다양성, 식량안보 및 생계 안정성, 전통적 사회조직을 통한 수자원 관리 체계, 그리고 경제ㆍ산업적, 사회ㆍ문화적, 생태ㆍ환경적 측면을 다각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 지역이 가진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가치를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본 결론에서는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보전을 위한 전략적 방향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선, 피기그 오아시스는 극한의 사막 환경에서도 전통적인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농업 생태계를 유지해 온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포가라(foggara)와 같은 전통적인 관개 시스 템은 제한된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농업 생산성 유지에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또한, 다층 경작 농업 시스템은 대추야자 나무를 중심으로 다양한 과일 나무와 작물을 함께 재배하는 방식을 통해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식량안보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최근 현대적 농업 방식의 도입과 함께 전통적 지식의 단절 가능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통농업 체계를 체계적으로 보전하고 현대적 농업 기술과 조화롭게 융합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오아시스 농경의 핵심 요소인 대추야자 나무숲과 전통적 관개 시스템은 물리적ㆍ경관적 측면에서 중요한 구조적 특징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를 전통적 농경 관행과 결합하여 일관성 있는 문화경관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이 요구된다.
둘째로 피기그 오아시스의 경제 구조는 대추야자 산업과 가축 사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근에는 협동조합을 통한 생산 및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추야자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 가공산업 및 유통망의 미비, 국제 시장 내 가격 경쟁력 저하 등의 문제는 지역 경제 성장의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베이우드(bayoud) 질병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와 기후변화로 인한 수자원 감소는 오아시스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로 지적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및 국제 개발협력기구와의 협력을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대추야자 생산 모델을 개발하고, 지역 특산품의 브랜드화 및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전략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셋째로 피기그 오아시스는 다민족 공동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독특한 사회ㆍ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인구 감소와 도시화로 인해 전통적 공동체 문화가 점차 약화되고 있으며, 농업 노동력의 감소와 젊은 세대의 농업 이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또한, 여성의 농업 참여율은 높은 반면, 여성의 토지 소유권 및 의사 결정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협력 방식(Twiza)과 공동체적 가치의 계승을 위한 교육 및 정책적 지원이 요구되며, 특히 여성의 경제적 권한 강화를 위한 제도적 개혁과 청년층의 농업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최근 피기그 지방 자치단체는 지역 유산 보호 및 가치 제고를 위한 정책적 노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절차를 병행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농업유산은 세대를 거쳐 전승된 인류의 중요한 자산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보전해야 할 필수적 요소이며, 동시에 문화 관광 분야와 연계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피기그 오아시스는 자연적ㆍ문화적 측면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지역 경제의 지속 가능성과 번영을 촉진하는 핵심 전략이 될 것이다.
적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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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모로코의 세계중요농업유산인 “피기 그(Figuig)의 크수르(ksour) : 수자원과 토지의 사회적 관리를 기반으로 한 오아시스와 목축 문화”를 대상으로 농업유산의 지속 가능한 농업ㆍ농촌 패러다임으로서의 가능성과 문제점 을 탐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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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기준을 통해 농업유산의 일반현 황, 지역적ㆍ전통적 지식시스템, 농업 생물다양성, 식량안보 및 생계 안정성, 전통적 수자원 관리 조직으로 분류하여 농 업유산의 다원적 기능을 분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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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기그 오아시스 GIAHS 가치 재정립을 통해 경제ㆍ산 업적, 사회ㆍ문화적, 생태ㆍ환경적 관점에 대한 분석과 문제 점을 제시함으로써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에 대한 농업ㆍ 농촌 발전 패러다임으로의 가능성을 고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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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를 통해 피기그 오아시스 GIAHS의 경제적, 사 회적, 환경적 가치를 구체화하고, 나아가 세계중요농업유산 이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지속 가능한 발전과 같은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례로 평가되길 기대함.